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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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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과 인생. 유지혜 -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찻잔을 잡은 그의 손 마디마디의 섬세함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잔을 기울이는 행위를 지켜보는 것은 눈을 감지 않고 하는 명상이었다. 발소리도 주의하게 되는 성당에 들어온 기분으로 졸졸 아름다운 소리를 들었다. 그는 액체가 흘러 내려갈 수 있게 구멍이 나 있는 나무 받침대에 용기들을 두고 뜨거운 물을 부어 잔을 달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언제나 물을 넘치게 붓는다는 거였다. 세례를 하듯 찻잔을 끝까지 물로 적셔 모든 부분을 꼼꼼하게 데웠다. 아슬아슬하지만 이완을 부르는 광경이었다. 차도, 어떤 하루들도 머리끝까지 잠겨야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밖을 나서니 특별한 날이 아닌 보통의 날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얀색 도화지처럼 평범해서 눈부신 날들. 이유 없이도 축하해야 할 날들이. ..
모든 날, 모든 시간이 가을같다. 민바람, 신혜림 - 낱말의 장면들 가을은 모든 날, 모든 시간이 가을답다. 쌀랑한 아침 바람도, 추적추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성긴 비도, 어느새 이렇게 낮이 짧아졌나 당황케 하는 저물녘과, 기분이 산뜻한 건지 쓸쓸한 건지 헷갈리게 하는 저녁 공기도. 마치 잊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쉼 없이 알려준다. 너는 서른아홉의 가을날을 지나고 있다고. 착실히 늙고 있다고. 철 지나 쓸모없어진 물건을 가을부채라 한다. 여름내 손에 붙어 있던 부채는 더 이상 덥지 않은 날씨에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힌다. 전성기가 지난 사람의 신세. 겨울부채라 하지 않고 가을부채라고 하는 건 한발 늦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늘 뒤돌아보며 한발 늦었다는 아쉬움 속에 사는게 인생이란 걸 생각하면 가을과 부채의 만남이 두 낱말 이상의 무게로 다가온다. 주머니 속 조약돌처..
아무것도 안 하고 그리워하기만 한다. 오지윤 - 작고 기특한 불행 무뚝뚝한 그를 닮아 무뚝뚝한 나는 효녀가 되겠다는 다짐 대신 그리움부터 키운다. 나는 그가 벌써 그립다. 그리워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다. 그에게 전화 한통 하는 것은 부끄러워, 벌써부터 아무것도 안하고 그리워하기만 한다. 아빠의 오늘이 나의 작은 오피스텔 원룸에 와서 노크를 한다. 나는 문을 열어 그의 오늘을 무릎 위에 올리고는 다 괜찮아질 거라고 쓰다듬는다. ⓒ 오지윤 - 작고 기특한 불행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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